갭 모에

오랜만에 데스크탑을 새로 맞추었다. 이번엔 본체의 크기가 무척 작다. 기존에 쓰던 컴퓨터도 본체가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이번엔 정말 작은걸로 맞추었다. 부피가 10L가 안된다. 기다란 각티슈 박스를 두 개 겹쳐놓은 크기와 비슷하다. 책상 한 켠에 자리잡아 존재감을 뽐내던 녀석이 홀쭉해졌다. 이젠 귀여워보이기도 하고, 인테리어 소품이라고 우겨봐도 될 크기가 되었다.
어릴 때는 이런 작은 컴퓨터를 싫어했다. 그 시절에 얇고 작은 컴퓨터는 대기업에서 만든 완성형 컴퓨터였다. 부품을 마음대로 업그레이드할 수 없었다. 그게 탐탁치 않았다.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. (근데 또 노트북은 잘 쓰고 있다.) 최근 SFFPC(Small Form Factor PC)에 대해 알 게 되었다. 작은 크기로 컴퓨터를 조립하는 것이다. 당연히 부품들을 바꿀 수 있다. 크기는 작지만 성능은 최신일 수 있다.
요즘 컴퓨터 사진들을 찾아보면 번쩍번쩍한 RGB로 도배하는게 유행이다. 커다란 컴퓨터가 빛까지 내고 있다면 당연히 눈이 간다. 하지만 ‘나 성능 좋아!’하고 어필하는 모습 같다. 난 겸손한 컴퓨터를 원했다. 작고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좋은 컴퓨터말이다. 옛날부터 이런 느낌을 좋아했던 것 같다. 아이팟터치를 쓸 때도 ‘이렇게 얇은데 인터넷이 돼?’하면서 기계의 얇은 면을 수시로 쳐다봤다. 마치 화면 뒤로 다른 차원의 공간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. 예전 디자인이지만 최신 칩셋이 들어있는 아이폰 SE2나 아이패드 미니5가 좋았다. 하나 가지고 있는 오토메틱 시계도 보기엔 평범한 시계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. 난 쭉 이런 제품들을 좋아했는데, 이제야 깨달았다.
그래서 그런가 사람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. 뭔가 열심히 자기 어필하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끌리지 않는다. 겸손한 사람에게는 궁금증이 생긴다. 자기 PR의 시대라지만 가짜가 진짜인 척 하는 세상에서 가짜인 척하는 진짜에게 더 흥미가 간다.